하늘에서본 포항제철소 부지 전경(사진: 포스코)

한국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과의 기본협정에 따르면 1972년까지는 제철소가 완공돼야 했고, 늦어도 1969년 초부터는 건설공사를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건설자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제차관 도입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포항제철(현 포스코)는 자금조달 문제는 정부에 맡겨놓은 채 공장부지 조성공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9년 1월이 돼서도 차관도입은 구체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미 수출입은행의 부정적 평가가 공개되는 등 사태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정부가 서유럽 쪽으로 눈을 돌려 접촉해 봤지만 결과는 마땅치 않았다.



박태준 사장이 직접 1969년 1월 31일 통역담당 최주선 부장과 함께 피츠버그로 날아가 KISA 대표인 포이 회장과 KISA 회원사들을 만났지만 허사였고, 워싱턴에서 만난 IBRD와 수출입은행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짐을 꾸리고 있을 때 포이 회장이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듣고 유감을 표하며 귀국 전에 자신이 추천하는 하와이 콘도에서 휴식을 취할 것을 권유한 것.



포이 회장의 호의를 받아들여 하와이에 온 박 사장과 최 부장은 해변을 거닐며 새로운 대안을 구상했다. 이 때 박 사장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떠올렸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이었던 청구권 자금 3억달러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균등분할로 무상지급하게 돼 있었다. 문제는 농림수산부문에 투자하기로 양국 정부간에 합의가 끝나 이미 국회 비준까지 얻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정부(경제기획원)내에 구성된 종합제철 건설 전담반 (사진: 포스코)

◆일본 업계 지원 약속으로 기사회생= 박 사장은 곧장 일본행 비행기를 잡아탔다. 생각을 구체화하려면 우리 정부는 물론 자금 공여자인 일본 정부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 먼저 일본 철강업계의 협조를 받아낼 작정이었다. 정·재계 실력자 야스오카 세이토쿠의 지원으로 이나야마 야와타 제철 사장과 나가노 후지제철 사장을 만나 호의적인 답변과 지원을 약속받았다.



일본에서 귀국한 박 사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자신의 ‘하와이 구상’을 보고했다. KISA는 이미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제철소 건설 자금 1억 달러를 마련할 유일한 방법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정부가 이 자금을 지원해주면 나머지는 포스코가 책임지고 조달해 사업을 기필코 성공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비밀에 붙일 것을 지시했다. 먼저 박충훈 부총리를 해임하고 김학렬 경제수석비서관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임명했으며,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건설전담반’을 설치했다. 1969년 8월 하순에 열리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청구권 자금 전용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박 사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일본쪽 로비를 추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를 움직이기란 쉽지 않았다. 비공식 접촉 결과 일본 정부는 전용계획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박 사장은 우선 일본철강연맹의 기술지원 약속, 특히 3대 철강회사(야와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의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이끌어내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어낼 생각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기업체의 요구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다시 야스오카를 찾아가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는 또 한 번 이나야마 야와타제철 사장과 만남을 주선해 줬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나야마 사장은 선뜻 지원을 약속했다. 이어 박 사장은 일본 철강기업 사장들과 철강연맹 임원들을 만났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3일 만에 야마타 야와타제철 고문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3대 철강사가 도야마를 위원장으로 하는 기술지원단을 구성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술 협의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박태준 사장 (사진: 포스코)

철강연맹은 이 문제로 전체회의를 열었으며, 우리 정부의 교섭단도 함께 참석해 KISA의 보고서와 한국의 철강수요 예측을 검토했다. 철강연맹 역시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박 사장도 최소한 몇 달은 걸릴 것으로 예측했으나 단 시일에 정계와 재계 인사들도 만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안보 위해 제철소 필요···日정부 움직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 내에서는 논의가 분분했다. 자금 전용 자체도 문제인 데다 배상시기를 앞당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비슷한 배상을 앞두고 있는 필리핀 등 제3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에서도 교섭단을 파견해 일본 정부를 설득했지만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철강연맹까지 움직여 일본 정부를 설득했다. 결국 그해 8월 15일 아이치 외상이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에 1억 달러를 재정차관으로 제공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오히라 통산상은 부정적 견해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박 사장이 수 차례에 걸쳐 오히라를 만나 설득을 계속하고 야스오카도 지원해줬지만 그는 냉담했다. 한국은 지금 농업에 투자해야 할 때며, 제철소는 무리라는 것이었다. 박 사장은 일본이 처음 제철소를 지을 때를 상기시켰다. 당시 제철소 건설의 목표는 국가안보였다, 한국도 전시상태인 만큼 안보를 고려해 제철소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오히라의 마음이 움직였다. 마침내 한국의 제철소를 지원하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제철소 건설 자금 확보의 전기를 마련한 한일기본협약 (사진: 포스코)

이제 공식적인 절차만이 남았다. 박 사장은 귀국하자마자 김 부총리에게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김 부총리는 확실한 물증을 요구했다. 박 사장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3대 철강사의 협조각서를 받아냈다.



1969년 8월 26일 오후, 아카사카의 영빈관에서 제3차 각료회담이 열렸다. 회담 이틀째 되던 날 포항제철 프로젝트가 의제로 상정됐다. 일본 정부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철강연맹과 상의한 후 자세히 검토하겠다고 주장했다. 김 부총리는 준비해온 각서를 꺼내 들었다. “한국에 100만t 규모의 제철소는 타당성이 있다”며 3대 철강회사가 기술지원을 약속한 것이었다.



결국 8월 28일 양국 정부는 각서에 서명했다. 다음날 일본 정부는 포항제철 프로젝트를 지원할 것이며, 서울에 대표단을 파견해 최종합의서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백지화 위기의 제철사업이 회생하는 순간이었다.<자료 제공: 포스코>





정리=채명석 기자 oricm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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