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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우리 국군은 6.25중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쳐 60여 만 명이 발생했고 다수의 무기도 파괴됐다.
국군의 뿌리는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군과 연합해 미얀마에서 심리전 활동을 펼쳤던 광복군은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특수공작 훈련을 받은 뒤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광복군은 이후 1946년 6월 미군정에 의해 해체됐으나 일부가 같은 해 6월1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요원으로 참여해 대한민국 건군에 기여했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이 탄생했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가 설치되고 이어 국군조직법과 국방부 직제령이 공포됨에 따라 정식으로 통위부가 국방부로 개칭됐다.
이어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편입, 법제화돼 국군이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6.25전쟁발발 직전 육군은 보병 8개사단과 2개 독립연대를 주축으로 총병력 9만여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 3년간의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각급부대의 증설 및 창설로 휴전당시 3개군단, 18개 사단으로 성장한다. 병력도 55만 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전쟁기간중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사상자가 무려 60여 만 명에 이른다. 전투병 13만 3016명이 숨졌고 비전투병 2842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종과 부상자를 합친 인명피해는 전투병37만 746명명, 비전투병 22만 8067명에 이른다. 부상으로 전투가 불가능해 제대한 의병제대자도 많았다. 사병이 6만 6923명, 장교가 376명이었다.
장비와 물자손실도 매어 컸다. 전쟁기간중 카빈소총 3만8333정, M1소총 8만 5560정, 기관총류 3419정, 로켓포류 2761정, 박격포류 1572문, 곡사포류 181문, 무반동총 160정이 파손됐다.
양낙규 기자 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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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뿌리는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군과 연합해 미얀마에서 심리전 활동을 펼쳤던 광복군은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특수공작 훈련을 받은 뒤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광복군은 이후 1946년 6월 미군정에 의해 해체됐으나 일부가 같은 해 6월1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요원으로 참여해 대한민국 건군에 기여했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이 탄생했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가 설치되고 이어 국군조직법과 국방부 직제령이 공포됨에 따라 정식으로 통위부가 국방부로 개칭됐다.
이어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편입, 법제화돼 국군이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6.25전쟁발발 직전 육군은 보병 8개사단과 2개 독립연대를 주축으로 총병력 9만여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 3년간의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각급부대의 증설 및 창설로 휴전당시 3개군단, 18개 사단으로 성장한다. 병력도 55만 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전쟁기간중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사상자가 무려 60여 만 명에 이른다. 전투병 13만 3016명이 숨졌고 비전투병 2842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종과 부상자를 합친 인명피해는 전투병37만 746명명, 비전투병 22만 8067명에 이른다. 부상으로 전투가 불가능해 제대한 의병제대자도 많았다. 사병이 6만 6923명, 장교가 376명이었다.
장비와 물자손실도 매어 컸다. 전쟁기간중 카빈소총 3만8333정, M1소총 8만 5560정, 기관총류 3419정, 로켓포류 2761정, 박격포류 1572문, 곡사포류 181문, 무반동총 160정이 파손됐다.
양낙규 기자 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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