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 ‘허정무 호’는 닻을 내렸다. 16강에서 막을 내린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의 항해.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하지만 모두가 웃은 건 아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상승세로 대박을 친 선수가 있다면 슬럼프의 나락에 빠져 쪽박을 찬 선수도 있었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명암이 엇갈린 선수들을 알아봤다.

희망 보여준 태극전사 3인방

이번 대회 ‘허정무 호’가 낳은 최고 스타는 이정수(가시마 앤틀러스)다. 조별리그 3경기서 2골을 넣으며 ‘골 넣는 수비수’의 면모를 보였다. 안정적인 수비 능력까지 갖춰 역대 한국축구 최고의 팔방미인으로 불리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잦은 부상으로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올해 부상악령은 훌훌 털어냈다.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돼 늦깍이로 이번 대회 명단에 합류했다. 부상으로 낙마한 곽태휘(교토상가)의 공백은 완벽히 메웠다. 세트 피스에서 강한 공격력까지 발휘해 조별리그 득점 2위에 올랐다.

이정수 만큼 주목받는 선수로는 수문장 정성룡이 꼽힌다. 대선배 이운재(수원)와의 경쟁 끝에 이번 대회에서 주전 자리를 꿰찼다. 활약은 빼어났다. 큰 키와 높은 점프력으로 공중 볼을 안전하게 처리했고 남다른 순발력으로 상대의 매서운 공격을 여러 차례 선방했다. 특히 16강 진출의 분수령이었던 그리스전에서 만회골을 노린 상대의 공격(슛 6개 유효슛 2개)을 온 몸으로 막아내며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수비형 미드필더 김정우(상무)도 활발한 움직임으로 16강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초 그는 마른 체형으로 체력이 떨어진다고 지적받았다. 다소 거친 태클도 문제로 거론됐다. 이번 대회에서 이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군인다운 패기와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악착같이 그라운드를 활보했다. 담당구역 미드필드에서는 수비수들과 유기적인 플레이로 상대 공격흐름을 수차례 차단했다. 여기에 노련해진 수비능력이 더 해져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 가장 성숙해졌다 평가받고 있다.

고개 숙인 왕년의 스타들

뜨는 별이 있으면 지는 별도 있기 마련. 가장 먹구름 짙은 건 공격진이다. 한국을 대표하던 이동국(전북)과 안정환(다롄 스더)은 이번 대회서 이렇다 할 출전기회조차 얻지 못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당초 이동국은 이번 대회 주전 공격수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됐다.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출전의 꿈을 이룬 그는 몸싸움과 포스트플레이에 능해 일찍이 박주영(모나코)의 투 톱 파트너로 점쳐졌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진출 신화의 주역 안정환은 조커로 그라운드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다.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 2회 연속 득점 등의 풍부한 경험과 높은 골 결정력이 팀 공격력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안정환은 그라운드에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이동국은 아르헨티나와의 본선 2차전,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기회를 얻었지만 출전시간이 적었다. 반면 자리를 대신한 박주영, 염기훈(수원), 김재성(포항) 등은 활발한 공격력으로 주전 자리를 굳혔다. 많은 나이를 고려할 때 두 선수에게 월드컵 무대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크다.

8년 간 대표팀의 골문을 지켜온 골키퍼 이운재도 이번 대회에서 독주체제를 마감했다. A매치 131경기에서 113실점한 베테랑 이운재는 남아공 출격 전부터 기량이 떨어졌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올해 8번 출전한 A매치에서 자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잠비아와 중국에 각각 4골과 3골의 대량실점을 기록했다.

소속팀 수원에서의 활약도 좌불안석이었다. 이전처럼 굳건한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다. 반면 이따금 골문에 섰던 정성룡은 눈부신 선방으로 허정무 감독의 마음을 흔들었다. 허정무 감독은 토너먼트에서 승부차기를 노린 히든카드로 이운재를 낙점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고, 마지막 월드컵은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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