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뜬금없이 ‘고난과 가난 예찬론’을 펼치자는 것은 아니다. 스펙이 곧 능력이라고 공공연히 떠드는 세상에서 남보다 못한 환경이 오히려 성공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조영욱(51)씨를 만나고 난 뒤 시련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할 수 있는지 곱씹는 계기가 됐다. 그는 “시련 덕에 좌절할 틈도, 열등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밑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웠던 폐지, 그것은 조씨가 인생2막을 새로 여는 비즈니스가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 주차장과 출판사를 돌았다. 폐지를 줍거나 반품·재고·파본으로 폐기돼 버려진 책을 사서 모았다. 그 책들을 절단기로 잘라 나온 폐지를 제지회사에 팔았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던 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넝마주이가 된 가장 조영욱씨의 마음은 복잡했다. ‘나는 이제 벼랑 끝에 섰다. 여기서 도망치면 더는 갈 곳이 없어.’ 2000년, 어느 날이었다.

연이은 사업실패 사글세방 밑바닥 인생
그의 젊은 날은 탄탄대로였다. 1987년 해운회사에서 첫 발을 내딛은 뒤 연봉 8000만원에 1000만원 이상의 수당을 받는 ‘잘난’ 영업맨으로 승승장구했다. 당시 과장급 평균 연봉이 2000만원 수준이었으니까 꽤 큰 돈을 벌었다.

뭘 해도 다 될 것 같은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딴 마음을 먹었다. 8년간의 직장생활을 갈무리하고 중국 물류 사업에 손을 댔다.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 무렵부터였다.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3년간 적자 속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 부도를 맞았다.

“욕심과 배짱만 두둑했어요. 빠른 기간 내에 성과를 내려고 서두른 데다 수요 예측을 정확하게 못한 탓에 쫄딱 망한 겁니다. 무식하고 무모했으니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던 거죠.” 당시 서른 일곱 살, 조씨는 졸지에 전 재산을 다 날리고 빚만 잔뜩 짊어진 빈털터리가 됐다.

지하 사글셋방으로 옮겨갔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건설현장 잡부와 하수도 청소, 신문 배달, 택배 배달원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월 100만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렸다. “새벽에 신문을 배달할 때였어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신문 꽂는 일을 맡은 아내가 승합차에 탔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달려간 거예요. 허겁지겁 쫓아 온 아내를 끌어안고 마냥 울었죠. 불법주차로 차가 견인돼도 범칙금으로 낼 돈이 없어 차를 되찾지 못할 때도 많았답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고난은 ‘세상의 것’과 그를 단절되게 만들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친구와 지인들을 멀리 했다. 두문불출하며 지내니 좋지 않은 소문도 파다했다. 불현듯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다잡아야겠다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영업직의 특성상 늘 가까이 했던 술과 담배를 계속 즐기는 저를 발견한 겁니다. 하루 빨리 일어서기 위해 나부터 바꿔야겠다 싶어서 딱 끊어버렸어요. 쉽지만은 않았죠. 금단 증상이 우울증으로 오더라고요. 신앙인으로서 기도를 통해 극복해 나갔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 예배만큼은 절대 빠지지 않았던 그는 2년 만에 어렵사리 1t 트럭을 구입해 자립할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시작한 게 버려진 종이와 책을 모으는 일이었다. 파쇄로 넘어가는 책은 무게로 환산돼 그때그때 폐지 시세대로 가격이 매겨진다.

책 한 권 무게는 450g 정도 되는데 코팅이 돼서 재활용이 힘든 표지와 제본 부위를 뜯어내고 나면 약 300g쯤 된다고 한다. 요즘 폐지 단가는 ㎏당 130원 남짓이니 책 한권 값이 40원쯤 되는 셈이다. 거의 현금성 결제로 이뤄진단다. 그러다 버려진 종이에 담긴 정보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버려진 종이 더미에서 문서보안 중요성 깨달아
‘파쇄와 보안의 접목’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불혹의 나이. 2001년 2월, 그는 500만원의 알토란 같은 자금으로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 창고와 비닐하우스를 얻고 절단기를 샀다. 출판사 두 곳도 인수했다.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내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내고 '모세보안리사이클링'을 설립, 정보 보호를 위한 문서 파쇄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파쇄 영역을 더 넓히고자 이듬해 150만원과 1t짜리 차를 갖고 직원 1명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내려왔다. 책뿐 아니라 서류 폐기 업무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사업은 아주 생소했기에 주변의 반응은 싸늘했다. 종이를 파쇄해 무슨 보안사업을 할 수 있겠냐며 무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치 세상이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첫 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적자를 많이 봤습니다. 제 손에 들어오는 돈이 한 달에 200만원이나 됐을까? 제일 힘든 사람은 물론 아내였습니다. 적은 돈으로 빠듯한 살림에 중·고등학생 자녀 뒷바라지까지 다 해야 했으니 말 다했죠, 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빚을 깨끗이 청산하고 신용불량자 꼬리표도 떼어버렸다. 2005년 그는 1억원의 자본금으로 문서보안 파쇄를 전문으로 하는 '모세시큐리티'라는 법인을 설립, 한 회사의 어엿한 대표가 됐다.

바로 그때 운명적 사건이 일어났다. “세하제지(전 세림제지)를 만난 것은 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어요. 상장까지 한 회사가 작고 알려지지 않은 우리 회사와 거래를 트자고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아무런 조건없이, 담보도 없이 수십억원을 선뜻 줬다는 게 믿어지세요? 당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허허허.”

10년의 노력 끝 문서보안 파쇄기업 톱에 등극
조 대표는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고 말했지만 그 운은 절대 ‘거저’가 아니었다. 무게를 부풀려 거래처로부터 가격을 더 받을 수도 있는 유혹이 도사리는 환경에서 그가 지킨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정직이었다. 조 대표는 이 제지회사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약 400평 부지에 압축기와 대형 파쇄기를 도입한 파쇄공장을 세웠다.

또 기술연구소를 마련해 문서파쇄기, 자체 파쇄시스템 등 연구개발에 매진했다. 원천 기술을 보유해야 시장을 선점, 리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은행이나 기업·관공서 등과 거래를 뚫고, 폐기해야 하는 수표 등 유가증권이나 정보 문서들을 대량 위탁받아 파쇄할 수 있었던 것도 기술 및 제품 경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 1월의 마지막 날 오후, 조 대표를 따라 경기도 파주시 본사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대형 문서 파쇄 공장을 찾았다. 잘게 찢어진 종이로 채워진 큰 꾸러미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파쇄된 수표 조각들이었다. “꾸러미 1개당 기본적으로 700~800kg 정도입니다. 여기 있는 것들을 다 합하면 아마 수 십 조원대는 될 거예요.” 조 대표의 말에 입이 딱 벌어져 기자가 한 마디 던졌다. “와~ 그야말로 보물창고네요.”

모세시큐리티는 국내 10여 개 문서보안 파쇄업체 가운데 최대 규모로 꼽힌다. 경기도 파주에 40명의 직원을 두고 2개 파쇄공장과 부설 연구소, 파쇄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문서는 물론 플라스틱 파일, 두터운 장부, CD까지 파쇄한다.

은행이나 정부기관, 대기업체, 보험사 등에서 생산된 개인정보 수록 문서나 보존기간이 만료된 문서 등을 정보 재생이 불가능하도록 파기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 수익을 창출한다. 2008년에 15억원, 2009년 23억원. 2010년 30억원으로 죽 상승세를 타며 지난해 연매출 43억원을 올리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은행만 하더라도 전국 1000여개 지점에서 나오는 회수 수표와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등의 서류가 엄청나거든요. 병원 진료카드나 약국 처방전, 소송 서류, 성적표 등 수백 톤씩 나오는 서류 뭉치 등이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폐지 수집상을 거쳐 어딘가에 흘러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아찔한지 상상이 됩니까?” 기자에게 연신 이해를 구하는 그의 표정이 정말 진지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시대적으로 재활용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얘기를 꺼냈다. 기존에는 사회약자층이 주로 재활용 관련 일을 했다면 요즘은 기업가들이 접근한다는 것이다. 파쇄기 하나 가격이 억 단위이고 시장 자체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지난해 9월 30일 시행에 들어간 개인정보보호법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적용 대상이 비영리단체를 포함해 350만 개 이상으로 늘어나고 보호 범위 역시 대폭 확대됨으로써 종이문서에 기록된 개인 정보까지 포함됐다는 것이다.

“최근 많은 기업에서 엄청난 양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소비자 피해, 기업 이미지 실추가 되는 상황이 빈번해지고 있어요. 택배 박스에 붙은 주소라벨까지 수집해 팔아넘기는 세상이잖아요. 정보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개인정보의 가치는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법 시행을 통해 개인정보를 취득 즉시 폐기해야 되므로 정보 보관 기간이 짧아져 문서정보 파쇄가 더욱 활성화 될 겁니다. 잠재력이 무한한 시장이죠. 올해는 70억~8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어요.”

“일자리 창출로 희망주는 기업인 되겠다”
생계를 잇기 위해 하루하루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서일까. 조 대표는 일자리 창출에 유독 관심이 많다. 2009년 민간주도형 공익적 사업의 일환으로 보건복지가족부·한국노인인력개발원과 MOU를 체결, 노인 일자리 만들기를 추진했다.

노인들이 손쉽게 문서파쇄를 할 수 있는 파쇄장치가 장착된 파쇄특수차량을 개발해 특허출원을 하기도 했다. 회사의 도서 정리 담당 직원으로 75세 어르신을 직접 고용한데서 그만의 고집이 느껴지기도 한다. 조 대표는 현재 일부 행정기관과 협의해 청년 실업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구상 중이다.

“세단기 렌털 사업의 경우 차 한 대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세단기를 임대하고 한 달에 1~2회 정기 방문해 정기 점검은 물론 저렴한 가격에 문서를 파쇄해 주는 서비스예요. 300곳을 관리한다면 월 900만원 정도 매출이 가능해요. 차량 운영비, 감가상각비 등을 제외하면 300만원 이상의 순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조 대표는 조만간 장애인 일자리 지원 사업에도 참여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인터뷰 전체를 오롯이 관통하는 조 대표의 바람은 분명했다. 힘겨운 중년들과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건네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그 희망을 위해 그는 기꺼이 ‘젊은 날의 상처’를 끄집어냈다.

원래 꿈은 연출자였단다. 어찌 보면 사는 것 자체가 연출이라는 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인생의 진리는 간단명료했다.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사니까 꿈대로 되더라고요.” 버려진 종이를 주워 넝마주이로 힘겨운 삶을 살았던 그가 이제는 버려지는 종이를 파쇄해 돈을 벌고 있으니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 불여줄 별명이 갑자기 떠올랐다. ‘모세처럼 기적을 이루는 사나이’….

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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