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리 천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 임원 1세대'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입사한 신입 공채들이 '별'을 달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풍(女風)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드리엔 멘델은 <유능한 여자는 많은데 왜 성공한 여자는 없을까>라는 저서에서 직장 생활에는 여자가 모르는 불문율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멘델은 유능한 여성은 많은데 성공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로 "여성이 목표지향적인 남성 사회의 룰을 모른 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관계지향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유능한 척, 강한 척하고 재미가 없어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하면 싸우고, 팀의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삼성의 별(임원). 불과 5년 전만 해도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주체는 남성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신경영을 선포한 1992년 당시부터 '여성 중용'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조직은 남성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지난 연말부터 삼성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1993년 처음으로 뽑은 대졸 여성 공채 직원이 별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삼성의 여성 공채 1기가 상무로 진급한 사실은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말 그대로 유리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 조직에서 오랜 시간 몸담으며 남성과 당당히 경쟁해 살아남고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그들. 유리 천장을 과감히 깨트린 여성 임원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인생 스토리. 20~30대 새내기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한민국 여성 임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한다.<편집자주>

[파워女星 임원 꿰찬 1세대 그녀들의 Success Diary]
⑨안혜주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

"나는 부동산쟁이 1호다!"
남자들 세계 좌충우돌
7년 걸렸습니다
안ㆍ혜ㆍ주 이름 석자 새기는데…

못 들은 척ㆍ강한 척ㆍ웃는 첫
3척쟁이役 하느라 많이 울었지만
IFC 서울 프로젝트 대성공
억척스러운 'Ms 오뚜기'

안혜주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 ▲1970년 서울 출생 ▲1996년 시애틀 퍼시픽 대학교 졸업 ▲1999년 로스엔젤레스 FIDM 졸업 ▲2000년 BHP코리아 프로젝트 매니저 입사 ▲2001년 코리아 에셋 어드바이저 과장 ▲2004년 존스 랑 라살 코리아 부장 ▲2005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2005년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이사 ▲2008년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 ▲2011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CRO 과정 수료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혹시 보험 아줌마? 외모랑 매치가 안 되는데 무슨 일 하시죠?'

'AIG' 기업이미지(CI)가 박힌 명함을 건네면 상대방은 꼭 그런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곤 한다. '그런데 가만 보자, 리테일 에셋 매니지먼트? 이 여자 뭐하는 여자야?'

열 중 아홉은 이런 식이다. 이제는 당당히 신분을 밝히지만 'AIG=보험사'란 이미지가 강했던 불과 7년 전만 해도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다.

서울 국제금융센터(영문명 IFC 서울) 맞은 편 빌딩. 여의도 빌딩숲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랜드마크'라 불리는 IFC 서울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안혜주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42). IFC 서울의 리테일 자산관리 총괄 책임자다.

한 눈에 봐도 '보험'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숱한 사람의 오해를 불러왔을 법한 강렬한 인상. 키는 170cm를 훌쩍 넘었고(딸 넷 중 가장 키가 작다고) 짧은 머리에 검은 정장. '사고 좀 쳤을 것 같은' 영락없는 커리어 우먼 느낌이다. 게다가 남성 일색인 부동산 바닥에서 15년 이상 흙밥 먹은 여성이라니.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AIG코리안부동산개발이란 생소한 회사에 '1호 사원'으로 몸담게 된 배경부터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만들어 낸 대작 'IFC 서울'과 얽힌 에피소드. IFC 서울 이후의 삶은 또 어떠할까. '파워女星' 인터뷰를 시작한 이래 첫 미혼 여성 임원이란 점도 많은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도면 한장과 이름 밖에 없던 그 때

부동산 업계 임원 인터뷰라서 남자 구경 좀 할까 했던 기자의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의도 IFC 서울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우글거렸다. 의외였다. 안 전무는 "전 직원 중 여성 비율이 3분의2를 넘는다"면서 "'남자 많은 세상 한 번 만들자'며 농담하곤 한다"고 말했다. '외국계라서 그런 건가?' 답은 상업 부동산(리테일)이란 생소한 곳에 있었다.

지난 2005년 11월 사무실조차 없을 때 안 전무는 사원 번호 1번으로 입사했다. 최종 경쟁자 5명은 모두 남성이었다. '외국계 부동산' 개념이 태동하던 때였고 분양이 아닌 임대를 중심으로 한 상업 부동산 시장에선 전문가를 찾을 수 없던 초창기 시절이다. 성(性) 불평등은 딱히 없었다. 외국 유학파로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안 전무가 IFC 서울 프로젝트 일원으로 낙점된 이유다. 국내 상업 부동산 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있어 AIG코리안부동산개발과 안 전무는 서로에게 후회 없는 선택이 됐다.

"AIG에서 복합몰(mall) 프로젝트를 처음 도입할 때였어요. 마케팅은 물론 임대, 개발, 시공 등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입사해보니 설계도면 달랑 한장과 이름 밖에 없었죠. 벤치마킹할 빌딩은 물론 물어볼 선배도 없었어요. 앞이 캄캄했지만 벌써 프로젝트 완료를 앞두고 있네요."

회사도 낯설었지만 IFC 서울 프로젝트 자체는 더 생소했다. 복합몰이라는 개념만 있을 뿐 컨셉과 브랜딩 작업을 시작으로 부지 매입, 개발, 마케팅, 임대 등 전 업무를 그야말로 맨 땅에서 시작해야 했다.

안 전무는 "6년 전에는 여의도에 오피스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안 될 땐데 쇼핑몰이 되겠느냐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며 "이미지를 깨는 데만 2~3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여성이라서 플러스 요인이 있었다"고 들려줬다. "회사 소개부터 프로젝트 방향을 설명하는 데 30분~1시간이 소요되는데 문전박대가 기본이었지만 가끔은 여자라는 이유로 들어주긴 하더라." 국내에선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상업 부동산 시장 1세대 여성으로서 좌충우돌의 연속이던 때다.

안혜주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 ▲1970년 서울 출생 ▲1996년 시애틀 퍼시픽 대학교 졸업 ▲1999년 로스엔젤레스 FIDM 졸업 ▲2000년 BHP코리아 프로젝트 매니저 입사 ▲2001년 코리아 에셋 어드바이저 과장 ▲2004년 존스 랑 라살 코리아 부장 ▲2005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2005년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이사 ▲2008년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 ▲2011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CRO 과정 수료

◆딜로이트 선임대 계약 따 냈더니

첫 성과는 3년여 매달린 끝에 왔다. IFC 서울의 마케팅이 좀처럼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은 '선임대(시행사가 미리 임차인을 모집해 임대 계약을 맺는 방식)' 때문이었는데, 안 전무가 그야말로 '대박' 계약을 물어온 것이다.

"당시 부동산 시장에서는 선임대가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어요. 사진만 있을 뿐 건물의 형체도 없고 이제 겨우 땅을 파고 있는데 계약을 하자니. '너네 미친 거 아니야? 사기꾼이지?' 이런 눈으로 쳐다봤죠. 딜로이트에 정성을 쏟으면서 이야기가 잘 되던 무렵 글로벌 금융위기가 왔고 방송에서는 매일 AIG 관련 부정적인 소식이 쏟아지더군요."

안 전무가 결국 서울 IFC의 오피스 빌딩(오피스1)의 9개층 딜을 따 낸 곳은 딜로이트였다. 2009년 5월 오피스 임대 시장에선 가장 컸던 8500평을, 심지어 선임대로 계약하면서 그는 부동산 업계의 스타덤에 오르게 됐다.

그는 "외국계 회사라서 향응을 제공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고 한해에도 30~40번 트레이닝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다"면서 "2~3년 동안 딜로이트 측과 인간적인 관계를 끈끈히 쌓으면서 'IFC 서울에 가장 먼저 입주해 딜로이트 브랜드 가치가 올라갈 것을 생각해보라'고 끊임없이 권유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IFC 서울은 오피스 빌딩 3개동(55층ㆍ32층ㆍ29층)과 힐튼 계열의 럭셔리 호텔 브랜드인 콘래드, 지하 3층 규모의 쇼핑몰로 구성됐다. 32층짜리 오피스1(One IFC)은 지난해 10월 입주를 했고, 오피스2(Two IFC, 29층)와 오피스3(Three IFC, 55층), 콘래드서울호텔은 연말 오픈할 예정이다.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IFC몰은 오는 8월30일 드디어 문을 연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어요

안 전무는 아직 결혼 전이다. '미혼 여성' 안혜주는 양면의 모습을 담은 듯했다. "그다지 가정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이 성공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그녀. 결혼을 하지 않아 남는 시간에 일에 올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남편이 벌어오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며 "좌절이 와도 오뚜기처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때는 미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보다 쉽게 상처를 받기도 했다. 업계 특성상 남성과 마주할 일이 많은데 간혹 원치 않은 대화의 주체가 되곤 해서다. 특히 성적인 비방의 대상이 된 것을 알면 대인 기피 증세마저 나타났다. "못 들은 척, 강한 척 견디면서 겉으론 웃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집과 회사만 오가던 때가 있었죠. 대중 앞에 나서길 꺼리게 되더라고요. 시장에선 살아남지만 뒤로 돌아 울어야 할 때가 많았죠."

목소리는 습관적으로 커졌다. 그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포스와 목소리로 상대방을 제압한 뒤 부드럽게 얘기를 하도록 내 자신을 다듬었다"고 했다. 남성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한 번이라도 '안혜주' 이름 석자를 각인하기 위해 부단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거쳤다는 진심 어린 이야기에 주위는 숙연해졌다.

얼핏 차가워 보이는 외모는 컴플렉스였다고. 안 전무는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위해 일부러 많이 웃고 떠들었더니 실제 많이 바뀌었다"면서 "지극한 O형과 남성적인 성격"이라며 웃었다.

◆먼 훗날 부동산이 나를 필요로 하게끔

'부동산 밥'을 먹으면서 안 전무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대목은 '국내에서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도전을 했다'는 사실이다. 상업 부동산 업계에서 큰 프로젝트의 1부터 10까지를 함께 한 첫 케이스라서 잘하든 못하든 1세대 전문가로 거론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안 전무는 큰 부족함 없이 프로젝트를 수행해 냈다는 평도 함께 받는다.

부동산 중에서 상업 부동산은 특히 여성이 장악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게 안 전무의 생각이다. "부동산 리테일이라는 게 여성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분야에요. 남자가 여자만큼 '브랜드'에 대해 많이 알고, 소비자 마음을 읽을 수 있나요? 부동산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리테일 전문가가 되라고 감히 얘기하고 싶어요."

안 전무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AIG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고 실력을 쌓았지만 의사 결정에 100%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해선 욕심이 남아 있는 그다. 안 전무는 "은퇴를 한다면 또 다른 비슷한 일을 지속하고 싶다"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해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나 자체를 마케팅하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 AIG를 찾아와 IFC 서울과 유사한 프로젝트를 문의한다면 그가 A부터 Z까지 겪은 경험을 토대로 조언할 수 있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것이다. '개인에 대한 마케팅'을 할 여지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멋진 꿈을 이룬 게 아닐까.

김혜원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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