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강물 속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고 전해지는 당나라 시인 이백. 그는 생전에 “청향만가 일미동춘(淸香滿家 一味動春)”이라 했다. 맑은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고 으뜸가는 맛은 봄조차 감동한다는 뜻이다. 충북 진천에 자리한 세왕주조 앞에는 이 말이 적힌 비석이 있다. 비석의 글귀를 또박또박 읽어주는 이규행(53) 씨. 그는 세왕주조의 3대 대표다.

“여기 푸른곰팡이 보이죠?” 양조장 벽에 드문드문 껴 있는 곰팡이를 가리키며 이 대표가 말했다. “곰팡이의 효모가 항아리 안으로 날아들어 술을 자연 발효시킵니다. 이거 더럽다고 없애면 큰일나요.”

나무의 골격을 그대로 드러낸 천장 속에는 왕겨가 들어있다. 이 대표는 “왕겨는 보온효과도 내고 효소를 생성하기도 한다”면서 “이곳은 양조장이면서 동시에 효모공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90년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양조장은 세왕주조의 창립자이자 이 대표의 조부가 직접 설계한 건물이다. 여기서 전통기법으로 빚어낸 덕산막걸리가 생산된다.

이 대표는 차남이다. 형이 운영할 수도 있었던 양조장을 물려받은 건 이 대표가 불혹을 몇 해 앞두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은 건축사로 일했다. 건축학과 재학당시에는 국전에 당선될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고 졸업 후에는 서울의 한 유명 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 건설경기가 바닥을 친 1998년, 그는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다. “어린 시절부터 보며 자라던 양조장인데 그땐 몰랐어요. 근데 보물이다 싶더라고요. 형과 아우 모두 승계를 거부했던 터라 그냥 두다간 잃어버리겠다 싶었죠.”

이 대표가 물려받은 건 비단 양조장뿐 만이 아니었다. 마이너스 통장도 함께였다. 1970년대만 해도 막걸리나 약주에 대한 인기가 좋았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약주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라는 말이 시중에 나돌았다. 일단 물려는 받았는데 사람들이 외면하니 막막했다. 아직도 술을 잘 모르겠다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운영 7년째 되던 날이었다.

“지금도 생생해요. 며칠 동안밖에 나가지 않고 침대에서 누웠다 앉았다 몇 번이고 반복했죠.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다 마치 영화처럼 한 줄기 빛이 비치더란다. “형광등 럭스의 100배 정도 되는 빛이 제 뒤통수에서 솟구쳐 나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술을 만드는 레시피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고 하면 믿으실까요. 뭔가에 이끌리듯이 그길로 벌떡 일어나서 양조장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3일 내내 술을 빚기 시작했어요.” 발효기술을 비로소 터득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 후 술맛이 좋다는 주변의 평도 무르익어갔다.

“부모가 자식을 열흘 만에 얻을 수 있나요. 술도 마찬가지예요. 사람 입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어요. 이 시간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효모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술에 잡균이 들어가면 분명 탈이나요. 좋은 술은 아무리 마셔도 다음날 숙취가 없어야 합니다.”

이 대표는 직접 만든 술을 양조장에서 마시지 않고 꼭 제값을 내고 사서 먹는다. 그래야 시중에서 소비자들이 접하는 맛을 똑같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제품이 나오는 날은 이 대표가 만취하는 날이다. 몇 모금 시음하는 차원이 아니라 몇 통씩 거푸 마신다. 좋은 술은 아무리 마셔도 숙취가 없어야 하고, 실제로 그렇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다.



정헌배인삼주, 정헌배
‘술꾼’ 교수님, 꿈을 담근다

안성시 가사동에 위치한 ‘정헌배인삼주가’를 찾았을 때 정헌배 대표는 잠을 설친 모습이었다. “새벽 네 시까지 연구하다 겨우 잠들었다”며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교수가 어쩌다 인삼주를 담그게 됐을까?

정 대표가 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영학도였던 그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제품이 무엇일지 고심하던 끝에 ‘술’이라는 답을 내고 여기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술에 대한 관심은 경영학적인 측면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술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

“명주(名酒)라는 건 그 지역의 자부심입니다. 부가가치가 높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전통적 가치를 대물림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선진국은 저마다 대표 술을 갖고 있고 후손들에게 물려줍니다. 프랑스 꼬냑이 좋은 예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내로라할 만한 주종이 없어요. 우리도 100년 묵은 술과 아름다운 술 문화를 물려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통주에 대한 그의 철학은 확고했다. 그렇다면 왜 인삼주인가. 술에 막 집중하기 시작한 정 대표는 1979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경영학 박사학위를 땄는데 논문이 ‘세계적인 명주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술은 지역 특화 술’이라는 결론을 낸다. 얼핏 당연한 얘기 같지만 당시 학계에서는 ‘콜롬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견이라며 찬사를 보내왔다.

정 대표는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각국 대표 술의 특화요인 비교표를 작성했다. 럼이나 보드카보다 스카치위스키나 꼬냑이 특화요소가 더 많고 이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의 인삼주 또한 특화요인이 다분하다고 분석했다. “우리 쌀과 우리 물, 그리고 6년근 인삼이 옹기 속에서 빚어내는 맛과 향 그리고 색이라는 삼박자…명품 술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이었죠.”

오랜 시간 술에 대한 연구를 해 왔지만 직접 술을 만든 지는 불과 4년밖에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공법을 장기간 설파했지만 무분별하게 술 생산에만 치중하는 모습에 발 벗고 나섰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도 그는 술 생산보다는 연구에 더 치중하고 있다.

“여긴 술 공장이라기보다 말하자면 ‘술 방앗간’이에요. 주문이 들어오면 쌀 빻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얼마 전 일인데요, 한 고객이 전화를 걸어 인삼주 한 독을 주문하고 글피에 택배로 받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3년 뒤에 보내주겠다고 대답했어요. 허허.” 최소 3년 숙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3년이 지나야지만 국제공인숙성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옹기 속에 담긴 인삼주는 빛이 들지 않는 지하저장고에서 이따금씩 클래식을 들으며 익어간다.

“지금 막 증류된 인삼주는 알코올의 향이 강하고 무색이에요. 알코올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 알코올은 3년 동안 인삼과 지내면서 자신의 고집을 꺾고 인삼의 색과 향을 품게 됩니다. 때로는 음악을 들으면서 서로 친해져요. 최상의 ‘마리아주’인 셈이죠.”

정 대표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다. 하나는 세계적인 술을 만드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술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 그래서 정 대표는 술을 만들고 있다. 현재 지하 저장고에는 약 1800개의 옹기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손끝으로 낳은 1800개의 자식들과 정 대표의 꿈이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안동전통명주, 윤종림
술통 속 비밀에 푹 빠진 사람

20대 초반 청년이 충남 청양의 한 양조장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술 만드는 과정을 엿볼라치면 혼쭐이 난다. 특히 누룩이 보관된 입국실 근처에는 발도 못 디딘다. 균을 파종시키는 과정은 그에게 철저히 기밀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 청년은 직접 술을 담그기 시작한다. 고두밥을 짓고, 누룩과 섞어 술통에 담는다. 술통 속에서 술이 발효되며 부글부글 거리는 모습에 청년은 눈을 떼지 못한다. 양조장에 몸담은 지 20년째가 되자 청년은 입국실 앞에서 손사래 치던 공장장에게 지시를 내리는 위치에 이른다. 윤종림 대표(44) 얘기다.

“균을 파종시키는 방법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장장이 자는 사이 몰래 들어가서 들여다보곤 했죠. 시간이 지나고 보니 별것 아닌 걸 갖고 어지간히 숨겼다 싶기도 해요.”

윤 대표는 제대한 직후 부친이 운영하던 칠갑산주조(주)에서 일을 도왔다. “제대하고 바로였으니까 21살, 22살 때였을 거예요. 손이 부족하다기에 당분간 가 있으려 했는데 발목을 잡힌 거죠. 한창 혈기왕성할 때 시골에만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술이 차츰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기 시작했을 때는 욕심도 생겼다. 낮에는 누룩내 나는 양조장에서 지내고 밤에는 책을 뒤적였다. 직접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더했다. 술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느꼈을 때는 이미 술에 푹 빠진 뒤였다.

“예를 들어 날씨가 더우면 술도 풀이 죽어요. 꼭 사람 다루듯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윤 대표는 술을 빚어내는 데 있어 중요한 건 기술이나 비법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말하자면 술과 내가 하나가 돼야 해요. 술을 빚는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 손에 만들어진 술도 좋을 수 없어요.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지만 술은 한 번 상하면 치료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래서 술을 할 때만큼은 정신과 몸이 건강해야 하죠.”

청양의 양조장을 물려받은 윤 대표는 안동으로 발길을 돌린다. 모 안동소주 업체의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안동소주는 브랜드 가치가 아주 높아요. 민속주로는 으뜸이죠. 그런데 다소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느꼈어요. 40도 이상의 높은 도수와 도자기 술병을 고수하죠. 가격도 높은 편이고요. 물론 전통을 지켜가는 것은 좋지만 지금 상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계기, 혹은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한 거죠.”

아쉽게도 낙찰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왕 내려온 거 특산품 허가를 받고 아예 공장을 차리면 되지 않나, 윤 대표는 생각했다. 그렇게 2008년, 안동전통명주(주)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19.8~30도 사이의 순한 안동소주를 폭넓은 가격대로 제공하고 있다.

‘전통’을 계승하기보다 전통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한 ‘보조역할’을 하겠다고 업계에 뛰어든 윤 대표를 향해 쓴소리를 던지는 사람도 많다. “전통을 해치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전형적인 안동소주는 그 모습 그대로의 가치를 지켜야죠. 다만 젊은 층을 포함하여 좀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판로를 넓혀주고자 합니다.”

아직 40대. 그러나 양조 경력은 20년 이상인 윤 대표는 우리 술을 좀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젊은 사람들도 전통주를 부담 없이 즐겼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 했다. 그 어느 날 양조장의 한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이코노믹 리뷰 박지현 jh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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