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남북전에서 역전골을 넣고 환호하는 허은별(가운데) [사진=정재훈 기자]

[아시아경제 전성호 기자]"오늘은 도저히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네요."

21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북한의 2013 동아시아연맹(EAFF) 축구선수권대회 첫 경기. 쇄도하는 취재진의 각종 문의에 대한 대한축구협회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그만큼 평범한 축구 경기가 아니었다. 8년 만에 한국 땅에서 열린 맞대결. 개성공단 폐쇄 등 최근 경직된 남북 관계 탓에 정치·외교적 관심까지 쏠렸다. 축구장의 환호에 미묘한 분위기가 뒤섞인 건 그 때문이었다.

경기 시작 전 풍경부터 생경했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동시에 그라운드에 등장했다. 곧이어 애국가와 북한 국가인 '애국가'가 함께 경기장에 울러 펴졌다. 이어진 관중들의 박수 소리는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 수는 6530명. 그 중엔 조총련 응원단 36명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에서 모여든 이들 왼쪽 가슴엔 인공기 배지가 달려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최 측은 좌석배치에도 각별히 신경을 기울였다. 우려와 달리 이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 마치 제3자처럼 경기를 관전했다.

반면 관중석 상단에선 한반도기 모양의 카드섹션으로 응원전을 펼치는 무리가 보였다.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에서 나온 응원단이었다. 그들은 양 팀을 향해 같은 크기의 함성을 보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다' '조국 통일'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엇갈린 관중석 분위기와 달리 그라운드 위는 뜨거웠다. 북한은 국제축구연맹(FIFA) 세계 여자랭킹 9위의 강호. 16위 한국도 지소연(고베아이낙) 차연희(고양대교) 등 정예 멤버로 팽팽히 맞섰다. 한국은 전반 26분 김수연(스포츠토토)이 선제골을 넣었지만 전반 36분과 38분 허은별(4.25체육단)에게 연속골을 내줘 1-2로 석패했다.

북한 선수단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서로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 두 손을 맞잡은 채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았다. '붉은 악마' 응원단 앞으로 달려가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에 관중들이 박수로 화답하기도 했다. 덕분에 경직됐던 분위기는 조금 풀리는 듯했다.

경기 후 붉은 악마 응원단을 향해 인사하는 북한 선수단 [사진=정재훈 기자]

그것도 잠시. 묘한 긴장감은 경기 뒤 기자회견장에서 다시 대두됐다. 협회 측은 "축구와 관련 없는 정치·국가 관련 질문은 받지 않겠다"라고 공표했다. '북한' 대신 '북측'이란 표현도 당부했다. 김광민 북한 감독은 취재진의 질문에 딱딱한 말투로 답변을 이어갔다. "여자축구에 대한 '원수님(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사랑과 배려가 대단하다"란 말엔 목소리가 다소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친근한 목소리로 윤덕여 한국 감독과 현역 시절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에서 함께 뛰었던 인연을 언급했다.

북한 선수들은 내내 '지도원'이라 불리는 북한 측 여자경호원에 둘러싸였다. 경기 전 한국 취재진이 다가가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유일한 접점이었던 경기 뒤 믹스트존 인터뷰마저 거부됐다. 취재진은 승리의 주역이었던 허은별의 이름을 불렀지만, 선수단 관계자의 "이동합니다"란 말에 허은별은 미소만 지은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서로를 눈앞에 두고도 한 마디 말조차 나누지 못한 사이는 휴전선 위아래 남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성호 기자 spree8@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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